곽병선 칼럼니스트.
곽병선 칼럼니스트.

 

무게가 고작 2.5kg 정도인 몽구스가 코브라와 정면으로 맞서면 몽구스는 코브라의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물러서지 않는다. 둘은 서로 공격하면서 탐색전을 벌이지만 몽구스는 상대가 지칠 때까지 코브라의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본다. 결국 먼저 지치는 건 코브라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몽구스는 코브라의 머리 부분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면서 긴 싸움은 막을 내린다. 어느 동물이든 먹이감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목적을 달성하려는 열정과 집념 없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무슨 일에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쉽게 포기해버린다. 포기하는 것만큼 쉽고 편한 선택은 없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기업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교훈이다.

1453년에 일어난 동로마제국과 오스만 술탄국 사이에 벌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긴 세월 이어온 로마제국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주역인 오스만 술탄국의 메흐메트 2세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각각 다른 여건에서 이 전투를 벌였지만, 역사는 승리하고자하는 열정과 집념을 가진 메흐메트 2세의 손을 들어 줬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통로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면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서쪽 방면으로의 접근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쪽에는 험준한 산과 악명 높은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기다리고 있어서 기존의 공성 전략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는 곳이었다. 422년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은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정면으로 뚫린 적이 없었다.

1449년 1월 6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 당시 동로마 제국은 거의 몰락한 상태였으며, 그 영토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만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에 외형상으로 보면 도시국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영토는 오스만 술탄국에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최선을 다해 통치했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망국의 기로에 있던 로마제국을 구하기 위해 외교에 전력을 다한 군주였다. 서유럽에 도움을 청했음에도 그가 얻은 것은 교황청에서 보낸 200명 정도의 병력과 식량 뿐이었다.

당시 서유럽의 상황은 동로마 제국에게는 비관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각각 백년전쟁과 레콘키스타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은 제후들 간의 분쟁으로 분열되었고, 폴란드와 헝가리는 1414년 벌어진 오스만 술탄국과의 바르나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에 교황령 외에 동로마제국을 돕기 위해 구원군을 보낸 나라는 제노바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이 당시 동로마제국의 병력은 모두 합쳐 8,000명 정도였다. 그중 가장 전투력 강한 부대는 수비대장에 임명된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이끄는 용병으로 약 2000명 정도였다.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으로 복위한 메흐메트 2세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가 복위하게 되면서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기득권 세력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브시르메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나뉘어져 지루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할릴 파샤는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을 반대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할릴 파샤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튀르크계 출신 기득권층을 제압하고, 데브시르메 세력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보위에 오른 후 입지가 약한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방안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유럽의 지배자를 꿈꾸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위하여 14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남동쪽 보스포루스 해협에 새로운 요새인 루델리 히사르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는 실질적으로 동로마 제국에 공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메흐메트 2세는 전통적으로 취약했던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대형 함대를 건조하는 한편, 공성전을 치루기 위해 헝거리인 우르반이 제작한 대형 공성포를 제작하여 실전에 배치하도록 했다. 길이 8미터에 무게는 19톤에 달한 이 대포는 300키로의 돌덩이를 1.6키로 넘게 발사할 수 있는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였지만 하루 7발 발사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 집중적으로 포를 집중한다면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1453년 4월 2일 부활절 다음 날,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공성포로 몇주에 걸쳐 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부정확한 조준과 재충전하는데 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점 때문에 방어하는 측에서는 일부 파괴된 성벽을 보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을 수 있었다. 포격 만으로는 성벽을 허물 수 없었다. 메흐메트 2세가 제작한 공성포는 부분적인 효과만 거두었을 뿐 성벽을 부수는데는 실패했다.

이와는 별도로 메흐메트 2세의 함대는 교황에 의해 지원된 4척의 선단을 놓쳐 이 선박들이 골든혼 안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서 동로마제국의 사기를 높이는 결과를 자초했다. 골든혼 입구에는 쇠사슬이 설치되어 오스만 함대가 진입할 수 없어 골든혼 외각에서 해안을 봉쇄하고 있었는데 이들 선박을 놓치게 되자 메흐메트 2세는 대노하여 함대 사령관을 해임하고 함자 베이를 새 사령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바다가 아닌 해안을 따라 통나무를 밑에 놓고 굴리는 방식으로 함대를 골든혼 안으로 들여보내 골든혼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제국은 양면에서 수성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안에서의 부분적인 성과와는 달리 지상에서의 오스만 군대의 공세는 별동대인 예니체리가 중심이 되어 파상적으로 벌어졌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5월 7일 2만5천의 오스만군이 투입되었지만, 그보다 10배가 적은 방어군에 의해 3시간만에 격퇴됐다. 이어 5월 12일 다시금 공세가 재개되었고, 이전에 투임되었던 많은 병력을 투입햇지만 동로마 제국은 황실 친위대까지 투입하여 이를 막는다.

성과가 없는 정면공격으로 피해가 늘어나자 타개책을 찾던 메흐메트는 갱도 건설을 계획한다. 5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 실행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요하네스 그랜트의 주도로 이를 막는다.

갖가지 계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메흐메트 2세는 초조해졌다. 막대한 보상금을 내걸고 독려했지만 성벽 공격의 주력부대인 예니체리의 손실도 점차 커져만 갔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답신에서 “이 도시를 넘겨 주는 일은 짐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지루한 공방전은 오스만 내부에서 계속 논쟁을 야기했다. 할릴 파샤는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반대했던 터라 더 이상 오스만 술탄국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으니 공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의 오른팔인 지아노스 파샤는 계속 공격할 것을 역설했다. 메흐메트도 잠시 흔들려 공성을 포기하는 것도 생각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마호메트의 예언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자가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을 가슴에 담는다. 때 마침 그이 계모이자 선왕의 왕비였던 마라 브란코비치가 사신을 보내 때마침 개기일식으로 이는 흥할 조짐이니 공격을 멈추지 말 것을 조언했다.

5월 26일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5월 29일 최후의 공세를 감행했다. 블라헤르네 방면은 11세기에 건축되어 가장 약한 곳으로 알려졌고, 이미 공성포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는 상태였다.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로 하고 3번에 걸쳐 공격을 감행하지만 방어군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가 정예병인 예니체리까지 투입하는 등 공세를 늦추지 않자 방어군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제국의 수비대장이던 주스티니아니가 복부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자 그의 부대들도 물러나게 되면서 방어군의 사기는 급락했다.

그러던 중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인 케르카포르타가 열리자 재빨리 예니체리가 이 문을 통하여 성문 안으로 진입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실상 함락당하고 만다. 동로마 제국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그들 가족과 탈출하려고 항구로 모여들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최후임을 직감하고 자주색 망토를 내던지고 단신으로 오스만 술탄국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그의 부츠만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집념이다. 재능, 두뇌, 성품, 인맥, 운과 같은 요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마음가짐과 마음 먹은 일을 끝까지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다. 21살의 혈기왕성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슴에 담고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룬 것이다.

(=열린뉴스통신) 곽병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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