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한 남양주시장.(사진=남양주시)©열린뉴스통신
조광한 남양주시장.(사진=남양주시)©ONA

(남양주=열린뉴스통신) 임성규 기자 = "세계를 지배한 네덜란드 황금기는 관용과 포용에서 시작됐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이같이 밝히며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이 2007년부터 3차례 발의 됐지만, 아직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밝히며 정치적 후진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19일 조 시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 두 번째 이야기로 '네덜란드' 국가와 관련해 남양주시민들과 소통을 펼쳤다.

조 시장은 SNS를 통해 "네덜란드하면 풍차, 튤립, 나무신발이 떠오른다."라며 운을 떼며,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 박지성 선수가 뛴 프로축구단 아인트호벤의 나라, 하이네켄 맥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라며 글을 남겼다.

그는 "오늘부터 세계역사상 '가장 작은 강대국'인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몇 차례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라며 설명했다.

또한 "16세기 말, 남부 네덜란드의 유대인과 개신교도 15만명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부 네덜란드로 향하게 되고 이들의 상당수는부유한 금융업자와 상인들, 고숙련 노동자와 기술자들이었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인구가 유입되어 수도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1670년에 25만 명으로 늘어났고 주민의 3분의 1이 외국계 혈통으로 그들의 자본과 기술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라고 말했다.

특히 "17세기에 세계를 지배한 '가장 작은 강대국'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이렇게 관용과 포용에서 시작됐고, 종교의 자유는 네덜란드 번영의 기초가 됐다."라며 덧붙였다.

이에 대해 조 시장은 "관용과 포용은 헌법 제1조에 명시될 만큼 네덜란드인들에게 최고의 덕목이지만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이 2007년부터 3차례 발의 됐지만, 아직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라며 글을 통해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과정을 첫 번째 청어잡이 어업과 농업혁명, 두 번째 조선업과 해상운송 혁명, 세 번째 시장경제와 금융혁명,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겠다."라며 세 번째이야기를 예고했다.

이에 남양주시민들도 "작지만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대한민국도 얼마든지 강국이 될 수 있다. 정치만 선진국으로 승격되면 가능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앞서가시는 조광한 시장님 응원드립니다."라며 다양한 글로 응원을 보냈다.

- 다음은 조광한 시장이 올린 전문이다.

▪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조광한 입니다.

'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에서
처음으로 살펴볼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하면 풍차, 튤립, 나무신발이 떠오릅니다.
푸른 들판에 풍차가 돌아가고 울긋불긋 튤립이 고상한
자태를 뽐내며,나무 신발을 신은 농민들이 보입니다.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
박지성 선수가 뛴 프로축구단 아인트호벤의 나라,
하이네켄 맥주로 우리에게도 친숙합니다.

20세기에..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식민지들을 잃었지만,
2019년 국내 총생산 세계 17위, 1인당 국민소득
5만2천4백달러로 세계 10위의 경제 선진국입니다.

남한면적의 약 40%로 경상남북도 정도의 크기이며
인구는 2백만에 불과한 자원도 없는 작은 나라가
17세기, 약 100년 동안 세계를 주름잡았던
강대국이자 최고의 부국이었습니다..!!

그 시기를 네덜란드 황금기(Golden Age)라 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주식,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은행, 신용 대출, 어음, 상품 거래소 등 각종 경제 수단과
경제 시스템은 황금기시절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것입니다.

오늘부터 세계역사상 '가장 작은 강대국'인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몇 차례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황금기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를
지배했던 스페인과의 관계와 역사적 배경을 우선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네덜란드와 남쪽의 벨기에를 합친 지역은
해발고도가 매우 낮아 옛날부터 두 지역을 합쳐
네덜란드, 즉 '저지대' '낮은 땅'이라고 불렸습니다.
홍수가 잦고 습지가 많아 백양나무를 파낸
나무신발을 많이 신었습니다

토양이 척박하고 농토가 적어 옛날부터 주로
상업과 무역으로 생활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종교와 사상에 개방적,관용적,포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개방적 관용과 포용은 황금기가 꽃 피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네덜란드를 지배했던 스페인은 6개 지역으로
구분됩니다. 이베리아 반도 중앙지역에 카스티야,
남쪽에 안달루시아, 동쪽에 아라곤, 카탈루냐,
북쪽에 칸타브리아, 나바라가 있습니다.
서쪽은 포르투갈입니다. 스페인의 중심지역인
카스티야는 13세기부터 종교와 사상에 관대하였고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을
포용해..그들의 경제력과 아랍인들의 뛰어난
기술로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 2세는 정략결혼을 한후
재정복사업(레콩키스타)으로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스페인을 통일하게 됩니다.

그직후 1492년, 통일 3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하는 '알함브라 칙령'을 단행합니다.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부족했고 레콩키스타의
공신들에게 하사할 재물이 필요하자, 유대인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해 추방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칙령은 유대인이 재산을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지만, 금 은 화폐의 반출은 금지되었고
추방까지는 단지 4개월뿐이어서 짧은 기간동안
재산 처분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6만 명의 유대인이 옆 나라 포르투갈로
갔는데,얼마 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자
종교에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황금기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을 추방한 후 스페인은 남아있던 유대인
수만 명을 화형에 처해 학살했고, 1556년에 즉위한
펠리페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스페인이
지배하던 네덜란드를 비롯해 전 유럽을 가톨릭으로
통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상인들의 직업을 보호해주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에 대한 교리가 확실한 칼뱅주의
개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펠리페 2세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가혹한 종교재판으로
만 명 넘게 죽이고 천여 명 가까이 화형 시킵니다.

이에, 네덜란드는 1567년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1648년 독립을 쟁취합니다. 스페인이 계속 지배한
남부 네덜란드는 나중에 벨기에로 분리되었습니다.

16세기 말, 남부 네덜란드의 유대인과 개신교도
15만명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부 네덜란드로
향하게 되고 이들의 상당수는부유한 금융업자와 
상인들, 고숙련 노동자와 기술자들이었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인구가 유입되어
수도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1670년에
25만 명으로 늘어났고주민의 3분의 1이 외국계 혈통으로
그들의 자본과 기술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7세기에 세계를 지배한
'가장 작은 강대국'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이렇게 관용과 포용에서 시작되었고,
종교의 자유는 네덜란드 번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강대국의 흥망'
두 책이 지적한 대로 개방적 관용과 포용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용과 포용은 헌법 제1조에 명시될 만큼
네덜란드인들에게 최고의 덕목이지만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이 2007년부터 3차례 발의 되었지만,
아직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과정을
첫번째 청어잡이 어업과 농업혁명,
두번째 조선업과 해상운송 혁명,
세번째 시장경제와 금융혁명,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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