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렁스' 정인지.(제공=연극열전)
'렁스' 정인지.(제공=연극열전)

(서울=열린뉴스통신) 위수정 기자 = “앞으로 하나씩 해나갈 일에 발자국을 찍고 싶어요.”

연극 ‘렁스’(제작 연극열전)가 작년 초연에 이어 1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일까?” 질문하며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두 남녀의 삶을 담은 작품으로 초연에 참여한 이동하, 이진희, 성두섭과 이번 시즌에 류현경, 오의식, 정인지가 합류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극 ‘렁스’는 영국 작가 ‘던컨 맥밀란(Duncan Macmilla)’의 대표작으로 2011년 워싱턴 초연 이후 미국, 영국, 스위스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됐다. 2020년 한국 초연 역시 새로운 형식과 시의성 있는 메시지,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대본의 매력과 힘이 인상적인 작품’, ‘비어 있는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는 작품’, ‘끊임없이 나 자신과 이야기하게 되는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객석 점유율 90%에 육박하는 성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최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연극열전 사무실에서 만난 배우 정인지는 “렁스는 분명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며 서두를 열었다. 이어 “상황 중심의 극이 많기 때문에 캐릭터가 살아있는 극을 만나기 쉽지 않다. 이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 특별한 상황을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거라 작품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대사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며 웃었다.

‘렁스’는 지구환경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여자 역의 대사가 방대하다. ‘어떻게 저걸 다 외울 수 있지?’라는 생각이 스쳐 갈 때 정인지는 “사무실이 독서실 분위기였다. 대사를 외우기 시작하니까 배우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사를 외우고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대사를 읊었다. 대사도 많지만 대본의 형식이 남녀 역할이 서로 정확히 끼어들어야 하는 부분도 있으며 작가가 원하는 사이가 정확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 외울 수도 없고 남자 역의 한 명의 배우하고만 호흡을 맞춰서도 안 된다. 사람마다 박자가 다르고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대사를 외우는 게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2021 '렁스' 성두섭-정인지.(제공=연극열전)
2021 '렁스' 성두섭-정인지.(제공=연극열전)

여자가 숨 쉴 틈 없이 내뱉는 대사를 각기 떨어뜨려 놓고 보면 이해가 되지만, 때로는 오락가락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저 여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 이에 정인지는 “공감”이라고 답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해결책을 바라는 게 아니라 공감을 바라지 않나. 예를 들어 숙제가 많아서 힘들면 여자는 "내가 숙제를 대신 못 해줘서 미안해"가 아니라 "숙제 많아서 힘들겠다"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내가 임신을 대신해 주고 싶다"고 말을 한다. 여자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어려웠고 이 여자의 생각을 도저히 모르겠었다. 처음에는 너무 짜증스럽게 갔더니 부딪히는 지점이 있고, 다시 남자의 의견을 물을 때도 있고 안아달라고도 하지 않나. 여자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지만 사랑스럽고 얄밉지만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연출님께서 극의 두 남녀는 매우 어리고, 어린 나이에 출발해서 다시 만났을 즈음이 서른이 넘었을 거라고 하셨다. 작품 배경이 런던이니까 박사학위라고 해도 한국에서 생각하는 나이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캐릭터를 잡을 때 임신과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어릴 수도 있고,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사회생활을 안 해봤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연출님께서 "여자는 어리고 일단 내뱉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며 힘이 넘치고 설득시키려고 한다"고 코멘트하셨다.”고 설명했다.

“아이 한 명의 탄소 발자국이 얼마인지 알아? 이산화탄소가 자그마치 1만 톤이야. 그건 에펠 탑의 무게라고! 나는 에펠 탑을 낳는 거야.”라고 외치는 여자이지만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는 순간 기분이 묘할 것이다. 임신 전후로 여자의 생각의 결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캐릭터를 만들 때 고민했던 지점이에요. 아이에 대해서 극도로 생각을 하고 임신하고 난 후부터는 기대감이 생기죠. 그리고 아이를 유산하고 끝없는 구덩이에 빠지고,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다시 임신했을 때 절망감이 포인트에요. 아이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극을 끝까지 못 가더라고요. 이 여자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데 본인이 환경 문제를 연구하니 마음과 머리가 따로였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설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는 좋은 사람인지 질문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갖는데 맞는 것 같아"라고 말해요. 머리로 말을 한 거죠. 그러다 유산이 되고 나서 "내가 뭘 잘 못 했지?"라고 말하는 부분이 너무 마음 아파요. 주위를 보면 유독 어떤 일이 생기면 여자들은 자신의 잘못은 없었는지 나에게 화살을 돌려요. 그리고 극에서 시간이 흐르고 다시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이제야 머리와 몸이 하나로 생각되죠.“

2021 '렁스' 성두섭-정인지.(제공=연극열전)
2021 '렁스' 성두섭-정인지.(제공=연극열전)

작품 속 여자는 환경에 큰 화두를 던지며 아이를 갖는 것에 남자와 의견이 충돌하지만, 현실에서는 경력단절의 불안감으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정인지는 “여자가 배가 불러오고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면 일하기 어려울 거라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남자가 "그렇다면 유감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어이가 없다. 여자들이 10개월간 임신하면서 겪는 고통에 대해서 남자들은 너무 모른다. 언제 착상하고, 몇 주에 아기집이 생기는 지, 유산을 하게 되면 5개월을 기준으로 유도분만에 들어가는 지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연습실에서도 남자 배우들을 이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르길래 제가 남자의 몸의 한 부분을 예로 들고 설명해줬더니 도가 지나치다고 할 때 답답했다. 여자들의 힘듦과 고통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는 여자의 캐릭터를 잡을 때 굉장히 깊게 들어갔더니 연출님께서 제가 너무 다 알고 있는 느낌이고 제가 훨씬 어리고 가벼워져야지 남자의 "유감이다"는 말도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안 그러면 ‘렁스’가 스릴러가 될 뻔했다”며 웃어 보였다.

여자는 아이를 유산하고 시간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둘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이에 정인지는 “이 남자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여자가 한 말을 기억하고 배우려고 하며 변화하려고 한다. 이 세 가지를 다 하는 건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존중한다는 의미 아닐까. 남자는 이 점을 충분히 지키고 변화할 것 같아서 여자와 아이와 재미있게 지내며 대화가 많은 가족으로 살았을 것 같다”며 해피엔딩을 그렸다.

연극 ‘렁스’를 보면 남녀의 배우가 하얀색 운동화를 벗고 새 운동화로 갈아 신는 지점이 있다. “여자가 임신할 때, 유산했을 때,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 신발을 벗어 두는 데 공감이 됐어요. 여자에게 임신했을 때 신발을 벗어두는 건 다음 세대에게 바톤을 넘겨주는 느낌이었죠. 저는 직업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배우를 통해 얻게 된 경험을 통해 실천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하나씩 해나갈 일에 발자국을 찍고 싶어요.”

정인지-성두섭.(제공=연극열전)
정인지-성두섭.(제공=연극열전)

‘우리, 나무를 심자. 너, 나 그리고 지구에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만 톤의 이산화탄소. 우리 세 사람’이라고 쓰여있는 ‘렁스’ 의 프로그램북. 환경 보호 운동가를 집중 조명하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평범한 두 남녀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정인지는 “환경이랑 떨어질 수 없는 내용은 분명하다. 이 이야기가 영특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 주제를 중심에 깔아두지 않고 캐릭터에게만 넣어서 구체화 시켰을 때 여자를 이해하다 보면 환경 이야기가 더 와닿더라. 아마 포스터에 핑크빛으로 ‘렁스 하트’, ‘본격 러브 스토리’라고 넣어뒀으면 오히려 관객들이 ‘환경 이야기 아니야?’라고 생각해 느낌이 달랐을 거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지금 쓰레기 더미 위에 살고 있는 건데 지구온난화로 날씨가 더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요즘 TV 광고 속 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전기 자동차, 환경을 신경 쓰는 기업 홍보 등 점점 환경을 신경 쓰는 인식이 더 많아진 것 같다”고 전했다.

정인지는 가방 속에 텀블러 2개와 손수건, 수저 세트, 장바구니를 넣고 다닌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플라스틱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찾아온다. 정인지는 “10번 중의 8번은 손수건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2번은 일회용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지 않으려고 한다. 최대한 환경을 신경 쓰고 있지만 정말 안 지켜지는 것은 제가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머리 감을 때 물을 엄청 쓴다. 머리만 감아도 10분 이상을 쓰기 때문에 제가 다른 거로 환경 보호를 해도 물 절약하는 건 참 어렵다”며 웃음을 지었다.

한편, 연극 ‘렁스’는 9월 5일까지 대학로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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