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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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열린뉴스통신) 위수정 기자 = “예전에는 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사랑하며 제 주위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뮤지컬 ‘스모크’(제작 (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 시인 ‘이상’의 연작 시 ‘오감도(烏瞰圖) 제15호’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으로 2017년 초연으로 큰 사랑을 얻으며 작년 12월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시를 쓰는 고통과 현실의 괴로움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남자 ‘초(超)’, 바다를 꿈꾸며 그림을 그리는 순수한 소년 ‘해(海)’, 이 두 사람에게 납치당한 여자 ‘홍(紅)’,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대를 앞서 나간 이상의 천재성, 식민지 조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예술가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날고 싶었던 열망과 희망까지 세상과 발이 맞지 않았던 절름발이 이상의 삶과 예술, 고뇌와 함께 식민지 사회의 암울한 시대상을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해냈다.

초와 해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시간을 함께 견뎌 내주는 강인한 인물 ‘홍’을 연기하는 배우 허혜진은 ‘스모크’에 처음 합류했던 날을 회상했다. 그는 “‘스모크’가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고 아직 제 역량으로 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한 작품이었지만 회사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느낌으로 해보자고 하셔서 영상 오디션을 열심히 보고 함께 하게 됐다”고 씩씩하게 답했다.

 

제공=(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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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접했던 이상의 작품은 띄어쓰기도 없고 한 번 읽고 이해하기에 어려워 다소 난해한 감이 있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이해가 됐냐는 질문에 허혜진은 “리딩 날 대본을 처음 봤는데 다른 배우들은 이미 한 달 전에 연습을 한 상태에서 제가 투입이 돼서 지문도 제대로 못 읽고 리딩을 했다. 그리고 ‘어떡하지? 하나도 이해 못했는데?’라고 생각이 들어 집에 가서 지문과 함께 찬찬히 읽어보니 이해가 됐다. 연기를 잘하지 않으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계속 보다 보면 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어서 관객이 ‘스모크’를 여러 번 보는 이유인 거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는 고등학교 때 예체능이라 ‘내 생에 이상 시인을 이해하는 날이 올까?’ 했었다. 연출님이 이상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고 글을 쓰셨을 때 이상처럼 힘드셨다고 하더라. 제가 공감하지 못한 부분은 연출님 통해서 이해받기도 했다.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은 "수많은 사람의 눈동자가 무섭다"고 했는데 저는 이상 시인만큼 극한 상황이 아니니까 막연한 공포가 신체적으로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이때 연출님께서 배우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주셨다”고 설명했다.

허혜진은 홍을 연구하며 와 닿았던 부분으로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의 넘버를 꼽았다.

“처음에 홍은 날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초반에는 낭떠러지에 있는 아이를 날게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데 제가 추락을 해야 날 수 있다는 걸 최근에 느꼈어요. 슬프기도 한데 추락하기 위해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마지막에 그 씬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엔딩이 따라 달라지더라고요. 초마다 가진 색깔이 있고 방향성이 있는데 그 방향성 안에서 주고받는 순간에 따라 엔딩이 달라요. 어느 날은 시원하게 웃거나, 또 어느 날은 ‘슬프지만 너희를 위해서 살려는 노력할게’처럼 끝나고, 다른 날은 ‘이 아이들이 날 수 있었을까?’ 싶은 날들도 있어요. 세 명이 감정을 어떻게 쌓아 와서 하나가 되냐에 따라 엔딩의 느낌이 달라지더라고요. 병근오빠(임병근)가 살고자 한 의지가 센 초가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제가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어요. 마지막까지 완강해서 ‘오늘 못 살리면 어쩌지?’싶었는데 마지막에 초가 홍을 끌어안는데 종이를 뒤집는 거처럼 그동안 쌓였던 게 확 뒤집히는 순간이 있었어요. ‘사람 내면이기 때문에 쌓이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 위화감 없이 갈 수 있구나, 이런 게 연기의 경력이구나’ 느꼈었죠.”

 

제공=(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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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해, 홍은 각자의 인물 같지만 하나의 인물로 유기적으로 얽혀서 이상을 나타낸다. 홍이 납치를 당해 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이 어땠을까. 허혜진은 “연습 때는 보고 싶고 그리웠던 해가 있어서 당장 만지고 싶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해가 저를 떼어내서 혼자 갇혀있던 공간이 현실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지 모르지만, 홍은 무한의 시간을 겪고 나와서 그 아이를 처음 보니 너무 미웠다. 보고 싶으니까 가까이하고 싶은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 미운데 좋고, 웃음은 나는데 투정도 부리고 싶은 감정으로 이때 오만가지 표정으로 보일 거 같다. ‘네가 날 떼어냈는데 나를 납치한 게 너야? 왜? 뭐 때문에?’라는 마음으로 너무 미운데 해를 미워할 수 없는 제가 미운 느낌이다”고 설명했다.

또한 초, 해, 홍 셋의 관계로 “처음에는 홍이 키를 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이 셋을 이으려고 수 없는 노력을 하지만 이 마음을 초가 열었을 때 세 명이서 하나의 존재가 된다. 또 홍이 초를 안아주지 못하면 셋은 하나의 관계가 되지 않고, 반대로 해가 처음부터 이 인물들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셋은 서로에게 어긋나면 안 되는 존재이면 끊어낼 수 없는 존재인 거 같다”고 덧붙여 답했다.

허혜진에게도 초, 해, 홍처럼 여러 명의 인격이 살고 있냐는 물음에 잠시 생각하더니 “사람들에게 보일 때는 수다쟁이고 리액션이 커서 이 분야의 전공이 아닌 친구들은 저를 보면 구연 동화하는 거 같다고 말한다. 액션이 크고 에너지가 밝지만, 사람에게 저마다의 깊은 외로움이 있듯이 저에게도 홍과 초도 있는 거 같다. 제 본체는 해보다 홍인 거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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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스모크’에는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예술가”라는 대사가 있다. 허혜진은 공연을 하는 ‘여’배우로서 이 대사가 어떻게 느껴질까. “젠더 프리가 많아지면 좋겠지만 기존에 있던 작품은 남자 키를 여자 키로 바꿔야 하고 제작사의 여러 수고가 많아져서 확 변하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대학로 소극장 공연은 ‘스모크’가 처음이라 대학로는 어떤 거 같다고 하기에 제가 아직 아기 배우에요. 그런데 대, 중극장에 있다가 소극장에 오니까 제가 어린 편이더라고요. 뮤지컬 ‘그리스’를 할 때는 고등학생, 스무 살로 어린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아직 어린 편이니까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성별을 떠나서 해보고 싶은 역은 뮤지컬 ‘블루레인’의 사일러스 역할이에요. 이번에 헤이든 로즈 역으로 함께 하지만 사일러스가 무조건 남자여야 하는 역할은 아니더라고요. 대본을 봤을 때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반전을 주며 캐릭터가 확 변하는데 두 가지 색을 다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 해보고 싶어요.”

허혜진은 극 초반에는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예술가”의 부분이 와 닿았지만 지금은 당연한 부분이 되었고 이제는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가 배우로서 다가온다고 전했다. 그는 “더 날기 위해서 추락할 용기가 있어야 날 수 있다는 게 무서운 말이면서도 해내야 하는 일인 거 같다. 새로운 캐릭터를 할 때 캐릭터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관객이 이 캐릭터를 사랑 안 해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걸 통해서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 감수 해내야 하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 같다. 비록 날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런 용기가 필요한 거 같다. ‘스모크’도 저에게 그런 부분이었다. 기존 배우들이 해왔던 걸 좋아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그거에 못 미치면 저에게는 최선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최고가 아닐 수 있어서 걱정됐는데 많이 응원해주셔서 지금은 올라갈 때마다 설렌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어 “‘스모크’ 시작 전에 매번 엄청 떨면서 하고 있다. 뮤지컬 ‘머더 발라드’랑 ‘스모크’를 유독 더 떨고 있는 거 같다. 심지어 ‘머더 발라드’ 두 번 빼고 청심환을 먹고 공연했다. ‘스모크’도 걱정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첫 곡을 부르면 그때부터 괜찮아진다. 마지막 공연 날까지 이렇게 떨릴 거 같다”며 웃으며 전했다.

뮤지컬 ‘스모크’를 보면 나의 내면에 어떤 점이 있 지 고민을 하게 된다. 허혜진은 자신을 괜찮은 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누군가가 저를 불쌍히 여길 수 있고 위로해주고 싶을 수 있는데 그게 너무 고마우면서 미안하다. 저를 이해한다는 게 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전제가 있는데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게 너무 미안하다. 자꾸 괜찮은 척을 하는 거 같다. 그리고 점점 슬픔에 무뎌지는 거 같다. 예전에는 이 정도면 죽을 만큼 힘들었을 일도 견뎌지는 게 제 감정에 무뎌지는 거 같아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홍도 저와 같은 인물이라 해, 초처럼 느끼는데 "나는 아프지 않아, 너도 아프지 마"라는 대사를 한다. 이때 ‘홍도 괜찮은 척을 하네? 너도 힘들고 부서질 거 같은데 말야’라는 점이 비슷한 거 같다”고 덧붙여 밝혔다.

작품에서 많이 들리는 단어 중 하나인 ‘고통’. 심지어 고통의 무게에 내가 바스라진다는 표현을 보고 이상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무엇보다 고통을 다루는 법이 더 중요한 법. 허혜진은 고통을 다루는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과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저는 저의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비빌 언덕이 있다는 말처럼 저는 서있을 공간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너무 힘들지만 괜찮은 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친오빠가 이십 대 후반의 지금 제 나이였는데 부모님 일도 정리해야하고 더 힘들 텐데 그걸 다 안고 해주더라고요. 저에게는 오빠가 홍이었어요. 초와 해에게도 홍이 있었지만 결국 아이들은 자기애가 있어요. 내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저도 그때 저를 사랑하고 지키고자했기 때문에 오빠라는 홍이 저를 안았을 때 안길 수 있었어요. 저 스스로를 사랑해주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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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된 천재’ 이상의 이야기로 작품을 하면서 허혜진은 배우로서 박제가 되고 있다. 스페셜 커튼콜로 사진이 찍히고, 프레스콜이 열리면 연기가 영상과 사진으로 남고, 이렇게 인터뷰로 그의 말이 기록에 남는다. 박제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솔직한 심정으로 허혜진은 무섭다는 말을 가장 먼저 내뱉었다.

“저는 이 사람을 처음 보지만 이 사람은 저를 알고 있잖아요. 이건 직업이 가진 특성으로 어쩔 수 없지만 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한 부분만 보고 ‘저 배우는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제가 실수를 했는데 박제되는 것과 과거에 실수하고 지금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넘어가는 것은 다르거든요. 반면에 박제가 무서운 부분도 있지만 신중한 부분도 있는 거 같아요. SNS에도 전 잘못한 게 없고 부끄러운 짓을 한 게 아니지만 제가 인지하지 못한 실수가 있을 수 있잖아요. 무대에 오르면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누구는 예쁘게 보고 누구는 안 좋게 평가하기도 하죠. 가끔은 피드백을 겸허히 받 들이고 싶지만 때로는 무섭긴 해요. 그래도 이 직업을 하면서 가지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허혜진은 올해 스물아홉으로 이십 대의 마지막을 빛나게 보내고 있지만 한편으로 삼십 대를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았다. 그는 꼭 해보고 싶은 작품으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와 ‘레드북’을 언급했지만 지금이 아닌 연기 경험을 더 많이 쌓고 삼십 대의 모습으로 하고 싶다고 한다. 단순히 그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욕심 보다 연기로 성장한 모습까지 담아내 표현하고 싶어 하는 모습에 훗날 몇 시즌을 거쳐 다시 돌아온 ‘베르나르다 알바’와 ‘레드북’에 오른 허혜진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배우로서 최종 목표를 묻자 허혜진은 “엄청난 성공보다는 제가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 허혜진으로 괜찮은 척 하는데 스스로 표출하지 못하는 게 있다. 배우로 감정을 소비하는 게 힘들지만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은 하기 힘든 부분을 연기하고 있지 않나. 누가 무대에서 합법적으로 마약과 폭력적인 연기를 하겠나. (웃음) 저의 본체로는 행복을 어떻게 표출할지 모르는데 무대에서 배우로서는 표현을 한다. 앞으로 작품을 계속하면서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사랑하며 제 주위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따듯하게 전했다.

한편, 허혜진은 뮤지컬 ‘스모크’로 3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 1관에서 관객을 만나며 3월 16일부터 ‘드림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블루레인’으로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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